윌리엄과 아드소는 살인 사건 조사 과정에서 지식과 신앙, 인간의 한계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게 되는데요. 작가는 작품 속 주인공들을 통해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이 맹신의 대상이 될 때, 개인과 사회에 참사를 불러올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와인쟁이의 시선으로 볼 때, 소설의 묘미 중 한 가지는 중세 시대 와인 산업의 중심이었던 수도원에서 와인을 소비하는 모습입니다. 작가는 와인을 인간의 욕망과 쾌락의 오브제로 활용했습니다. 예컨대 작품 속 수도원 식탁 장면에서도 수도사들은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식탁에서 포도주의 질을 자랑하거나, 포도주 한 잔을 갈망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식입니다.
오늘 와인프릭은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철학자·역사학자였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어울리는 와인 브랜드, 루시엔 르 무앙(Lucien Le Moine)을 소개합니다.
“원장이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의 질을 자랑하면 우리는 음식이 대단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모금 또는 한 입마다 영적 독서가 동반되지 않았다면 이 자리는 여느 탐식가들의 모임 같았다.” -장미의이름 中
수도원, 유럽 와인 문화의 심장
서양사적으로 보면, 로마 제국이 쇠퇴한 이후 유럽 와인 산업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유지·발전합니다. 미사 등 교회 의식에 반드시 필요한 와인을 자급자족해야 했기 때문에, 수도원은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에 힘을 쏟았습니다.십자군 전쟁 뒤엔 중동에서 새 포도 품종이 유입되면서, 유럽 포도의 다양성과 품질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수도원은 새 품종을 적극적으로 도입·개량하며 와인 문화의 확산에 앞장서기도 했죠. 한 마디로 중세 수도원은 와인 문화의 보존자이자 혁신자였습니다.
‘장미의 이름’ 속 수도원 역시 그랬습니다. 거대한 도서관과 규율, 금기 그리고 미지의 비밀이 얽혀 있는 미궁 속에서 수도사들은 매일 같은 시간에 기도하고 필사하며 때로는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와인은 이들에게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신과 인간을 잇는 매개체에 가까웠죠.
수도사들은 포도밭을 가꾸고, 압착기로 포도를 눌러 와인을 만들었습니다. 와인은 그들의 노동과 명상, 그리고 신에 대한 경외심이 응축된 결과였습니다.
‘괴짜 수도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와인 브랜드, 루시엔 르 무앙도 이러한 중세 수도사들과 꼭 닮았습니다. 루시엔 르 무앙은 레바논 출신 양조자인 무니르 사우마(Mounir Saouma)와 그의 부인인 로템 사우마(Rotem)가 설립한 와인 브랜드입니다.
루시엔 르 무앙이라는 프랑스어 이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루시엔’은 아랍어인 무니르의 뜻(빛)을 프랑스식으로 바꾼 것이고, ‘르 무앙’은 불어로 수도사라는 뜻이죠.
실제로 무니르는 1980년대 중동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포도밭을 돌보며 처음 와인을 배웠다고 합니다. 당시 경험한 수도원의 조용한 일상, 느릿한 양조, 그리고 자연과의 대화가 그의 와인 철학의 뿌리가 된 셈입니다.
“…그녀가 내게 입맞춤을 했고, 그녀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했으며, 그녀의 향유는 기분 좋은 향기를 풍겼다…” -장미의이름 中
수도사와 와인, 신과 인간을 잇는 다리
수도원에서 배운 전통적인 양조법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무니르는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포도 재배와 양조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부르고뉴와 프랑스 전역, 캘리포니아의 와이너리 등에서 다년 간 경험을 쌓았습니다.그리고 1999년, 아내 로템 브라킨(Rotem Brakin)과 함께 프랑스 부르고뉴 본에 정착해 ‘루시엔 르 무앙’을 설립합니다. 이들은 포도밭을 소유하지 않고, 오직 부르고뉴 최고 프르미에 크뤼와 그랑 크뤼 포도밭에서 극소량의 포도만을 엄선·구매하는 마이크로 네고시앙(micro-negociant) 방식으로 와인을 양조합니다.
그리고 와인을 빚을 때는 오직 손만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각 크뤼마다 단 1~3개의 배럴만을 생산하는데, 해마다 다른 방식으로 와인을 숙성시키죠. 엄격하고 고집스러운 그들의 집착과 실험 정신은 이러한 규율을 통해 신에게 다가가고자 했던 수도사들을 닯았습니다.
와인 양조 과정에서 극단적인 순수주의를 지향하는 것도 소설 속 고통스러운 필사를 반복하는 수도사의 고행과 묘하게 닮았습니다. 루시엔 르 무안의 와인은 ‘괴짜’라는 별명에 걸맞게 자연 효모만을 사용하고, 효모 앙금(lees)과 함께 오랜 시간 숙성합니다.
랙킹(racking·와인을 옮겨 앙금을 제거하는 작업)도 최소화하고, 매년 수확한 포도의 상태와 특성에 따라 양조법을 달리 적용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떼루아(terroir·기후와 토양 등 와인의 캐릭터와 품질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의 순수한 표현을 위한 집착에 가깝습니다.
루시엔 르 무앙의 양조 방법이 이렇다보니, 매년 다른 캐릭터의 와인이 탄생합니다. 어떤 해는 가죽과 시가의 뉘앙스가 돋보이고 또 어떤 해는 장미와 라즈베리, 산딸기의 신선함이 두드러지는 식입니다. 공통점이라면 매번 그 해의 떼루아를 오롯이 담아낸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점과 미디엄 바디, 생생한 산미, 섬세한 탄닌, 그리고 입안을 감싸는 미네랄이 고급스러운 피날레를 선사한다는 점입니다.
“그가 웃을 때, 와인이 목구멍에서 콸콸 흐르듯, 농노는 자신이 주인이라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 순간만큼은 주인과의 위치가 뒤바뀌기 때문이다.” -장미의이름 中
![루시엔 르 무앙의 오너 무니르와 로템 부부. [출처=로템 & 무니르 사우마 홈페이지]](https://imgnews.pstatic.net/image/009/2025/05/31/0005501807_003_20250531171711057.jpg?type=w860)
수도사적 집착, 무소유의 자유
루시엔 르 무앙과 수도사의 닮은 점은 무소유(無所有)에서도 드러납니다. 수도사들은 사적 이익이나 개인을 포기하고 공동체 생활을 통해 일생 동안 최소한의 소유와 소비 만을 하는 삶을 삽니다. 이 역시 신에게 가까워지기 위한 하나의 고행으로 삼는 셈입니다.루시엔 르 무앙도 소믈리에나 교육자 같은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부르고뉴를 방문하게 된다면, 현지에서 찾아서 구입하는 1순위 와인으로 꼽힐 정도로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음에도, 포도밭을 직접 소유하지 않고 있습니다.
부르고뉴 포도밭의 값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치솟은 영향도 있겠습니다만, 각 빈티지마다 가장 뛰어난 프리미에 크뤼와 그랑 크뤼 포도만을 엄선해 소량의 와인을 생산하 떼루아를 자유롭게 탐구하고자 하는 철학적 이유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 이들은 해마다 포도의 상태와 빈티지 특성에 따라 생산하는 와인을 달리하고 생산량도 100배럴로 한정했습니다. 포도밭 소유에 얽매이지 않도록 노력함으로써 오히려 자유롭게 다양한 크뤼와 떼루아의 개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랬던 그들이 부르고뉴가 아닌 론 밸리(Rhone Valley·프랑스 남동부, 론 강을 따라 북쪽 리옹에서 남쪽 아비뇽까지 길게 뻗어 있는 와인 주요 산지)에서는 직접 포도밭을 구입해 ‘로템 & 무니르 사우마(Rotem & Mounir Saouma)’라는 이름으로 포도 재배부터 양조까지 하고 있습니다.
어떤 변화 때문일까요? 무니르의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론 지역 자신의 와이너리에 대해 ‘아기를 입양해서 키우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아이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부모님처럼, 론 지역의 땅에서 자신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모든 지혜와 철학을 쏟아붓는 모습입니다.
“옛 장미는 이름만 남고, 우리에겐 이름뿐이다.” -장미의이름 中
![로템 & 무니르 사우마 와이너리 포도밭의 토양. 다양한 토양 중 주로 자갈과 모래, 작은 돌로 이루어진 그래블 토양(Gravel soil)이다. [출처=로템 & 무니르 사우마 홈페이지]](https://imgnews.pstatic.net/image/009/2025/05/31/0005501807_004_20250531171711083.jpg?type=w860)
론에서 피어난 새로운 수도사 와인
론 지방 포도밭은 다양한 토양(갈레, 가리그, 시스트 등)과 각 토양에 잘 맞는 품종의 블렌딩이 중요한데, 그들은 직접 포도밭을 소유함으로써 포도 재배부터 양조까지 전 과정을 통제해 자신만의 스타일과 철학을 더욱 직접적으로 실현했다는 설명입니다.실제로 루시엔 르 무앙의 론 와인(로템 & 무니르 사우마)은 부르고뉴에서 보여준 수도사적 집착과 실험 정신의 연장선으로 불립니다. 이들이 집착해온 바토나주, 긴 숙성, 최소한의 개입 등 부르고뉴에서 쌓은 고대 방식에 대한 노하우를 론에서 그대로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일각에서는 루시엔 르 무앙이 부르고뉴에서 네고시앙으로서 다양한 크뤼의 떼루아를 실험했다면 론에서는 직접 땅을 소유하고 다양한 마을과 토양, 품종을 조합해 새로운 스타일을 실험하는 새로운 장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특히 이노피아(Inopia, 결핍)라는 와인 이름에서 드러나듯 극단적으로 개입을 최소화한다는 철학은 양조를 넘어 포도 농사에까지 적용됐습니다. 부르고뉴의 명성을 론 지역에 이식해 그르나슈 등 론 품종을 부르고뉴의 감각으로 해석하는 점은, 전통과 지역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창작 정신의 결과로 해석됩니다.
재밌는 점은 이들이 이미 부르고뉴에서 성공을 거두고도 론에서 포도밭을 매입해 새로운 도전을 하는 모습조차 수도사들의 모습과 닮았다는 점입니다. 가히 수도사와 뗄라야 뗄 수 없는 와인인 셈이죠.
마치 이미 뿌리가 넓게 퍼진 유럽에서의 안락한 삶을 두고, 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미지의 지역을 향해 선교를 떠나던 수도사들의 모습과 겹쳐보인달까요. 이 때문에 로템 & 무니르는 루시엔 르 무앙의 정신을 남프랑스에서 발현한 새로운 ‘수도사 와인’이라고 부를만합니다.
루시엔 르 무앙의 와인 속엔 소설 ‘장미의 이름’ 속 수도사의 고요한 침묵과 집요한 탐구, 그리고 인간적인 열망이 겹겹이 펼쳐지는듯 합니다. 진리와 신앙, 지식과 욕망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수도사들처럼, 매년 다른 떼루아의 진실을 좇으며 와인에 새긴 그들만의 해답을 음미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