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양인터내셔날

19 아르헨티나 벰버그 와인

아르헨티나 와인 벰버그의 수석 와인메이커 다니엘 피(왼쪽). 벰버그의 '라 린테르나 카베르네 소비뇽'.

"Don't cry for me Argentina."(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영화 '에비타(Evita)'에서 마돈나가 불렀던 노래입니다.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의 부인 에바 페론의 삶을 그린 영화인데요. 에바 페론은 1947년 28세의 나이에 남편 후안 페론의 대통령 당선(1946년)을 기념하며 유럽 여행에 나섭니다. 당시 교황 비오 12세와 스페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등 유럽 각국의 정상을 만나 '레인보 투어'라고 불립니다. 에바 페론의 일정엔 스위스 방문이 포함됐습니다. 후에 에바 페론이 횡령한 거액의 돈을 스위스 은행 비밀 계좌에 옮겨놓은 것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에바 페론이 스위스를 방문하던 중 '토마토 투척' 사건이 벌어집니다. 에바 페론은 군중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잘 보여주기 위해 뚜껑이 열리는 오픈카를 타고 있었는데 누군가 에바 페론을 향해 토마토를 던진 것입니다. 일명 '토마타조(Tomatazo·토마토로 때리기)' 사건인데요. 화가 잔뜩 난 에바 페론은 유럽 각국의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사건의 배후를 밝히라고 지시했고 '벰버그 가문(Bemberg Family)'의 여성이 지목됩니다. 이번 주는 아르헨티나 와인 '벰버그'에 관한 얘기입니다

아르헨티나 최고의 와인을 생산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벰버그 와이너리(Bemberg Estate Wines)는 2011년 설립된 신생 와이너리입니다. 하지만 그 역사는 17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벰버그처럼 'berg'로 끝나는 이름은 독일 등 동유럽 유대인에게서 흔합니다. 독일에서 태어난 오토 벰버그는 1850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합니다. 오토 벰버그와 그의 아들 오토 제바스티안은 맥주 회사를 세우는 등 여러 사업을 벌입니다. 지금은 아르헨티나의 대표 맥주가 된 세르베자 킬메스(Cerveza Quilmes)입니다. 벰버그 가문의 '부'는 오토 제바스티안의 아들 오토 에두아르도 때 절정에 이릅니다. 그는 1929년 미국 경제대공황을 알린 검은 목요일 전에 모든 주식을 처분하고 대신 400t에 달하는 황금을 매입해 벰버그 가문의 재산을 지킵니다. 이후 "재산을 일구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벰버그 가문에 전해집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정치 격변을 벰버그 가문도 피하지 못합니다.

오토 벰버그.

시사매거진 타임은 1944년 7월 10일자에 '벰버그 가문의 몰락'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냅니다. 첫 문장이 벰버그 집안의 가장인 오토 벰버그의 57세 생일에 아르헨티나 경찰이 벰버그 가문은 덮쳤다는 겁니다. 당시 독점적 지위에 가까웠던 맥주 사업으로 큰돈을 번 벰버그 가문은 목화, 유제품, 전력 등으로 사업을 넓히며 아르헨티나 최고 부자 가문으로 이름을 올립니다.

노동자 계급의 불만을 등에 업은 후안 페론은 벰버그 가문의 재산을 몰수한 뒤 국유화합니다. '아르헨티나 자본주의의 위기' '독점, 권력, 정치. 벰버그 그룹에 맞선 페론' 등과 같은 책들에선 당시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후안 페론과 벰버그 가문의 갈등이 그려집니다. 에바 페론을 향한 '토마타조'는 그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타임은 당시 상황에 대해, 벰버그 가문은 재산이 추정이 안 될 정도로 많고 아르헨티나의 전 재산을 몰수당해도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해외 자산이 상당하다고 묘사합니다.

현재 벰버그 가문은 오토 벰버그 이후 7대에 걸쳐 400여 명으로 늘어났고, 미국과 유럽에 기반한 자산운용사 퀼베스트(Quilvest)를 보유하고 있는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벰버그 가문은 2010년엔 당시 세계 9위 와인그룹이자 아르헨티나 최대 와인그룹인 페냐플로(Grupo Penaflo)를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와인 사업에 뛰어듭니다. 페냐플로 그룹은 아르헨티나 대표 와인 브랜드인 트라피체(Trapiche)를 비롯해 여러 와인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아르헨티나 와인 내수시장의 20%, 수출의 2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어 가문의 이름을 걸고 최상급 와인을 만든다는 목표로 2011년엔 벰버그 와이너리를 설립합니다. 벰버그 가문의 문장도 와인에 들어갑니다. 트라피체의 대표 와인 이스카이를 출시한 세계적인 와인메이커 대니얼 피(Daniel Pi)가 벰버그의 수석 와인메이커로 합류합니다.

'피오네로(Pionero)'는 벰버그의 시그니처 와인입니다. '피오네로'는 선구자를 의미하는 파이어니어(Pioneer)의 스페인어입니다. 오토 벰버그를 기념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피오네로는 '엘 토미요'라는 해발 1250m의 와이너리에서 출시되는데 멘도자의 우코 밸리 구알타야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각 와인당 1만병 이하를 생산하는 소규모 양조(Micro-vinification)로도 유명합니다.

피오네로 2019 빈티지가 제임스 서클링으로부터 99점이라는 최고의 점수를 획득하면서 최고급 아르헨티나 와인을 만들기 위한 벰버그 가문의 노력이 결실을 봅니다. 2014년 빈티지는 98점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두 빈티지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2014년 빈티지는 말벡 78%, 카베르네 소비뇽 15%, 카베르네 프랑 7%로 여전히 아르헨티나 대표 품종 말벡이 주를 이룹니다. 하지만 2019년 빈티지에선 카베르네 소비뇽이 포도 품종 배합의 주를 이뤘다고 합니다.

피 와인메이커는 "전 세계 프리미엄 와인 시장이 클래식한 카베르네 소비뇽을 찾고 있다"면서 "카베르네 소비뇽을 강조하고 싶어 말벡의 비중을 낮췄다"고 설명했습니다.

아쉽게도 2019 피오네로는 아직 한국 출시 전이라 맛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말벡으로 만든 2014년산은 숙성된 부드러움이 잠재력을 보여줬습니다. 피 와인메이커는 30년 이상의 숙성 잠재력이 있는 와인이라고 소개했습니다.

2022년 제임스 서클링 관계자들이 피오네로를 2014~2018년 빈티지까지 버티컬 테이스팅한 뒤 복합미와 구조감이 우수하다고 평가했습니다. 2014년 빈티지를 제외하곤 아직 덜 숙성됐다는 평가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2014년과 2019년은 포도 품종 배합도 달라져 버티컬 테이스팅을 하면 두 와인의 차이가 확 느껴질 듯합니다.

국내 와인 수입사인 금양에서 벰버그 가문의 와인메이커 피의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만 해도 당연히 아르헨티나 말벡에 관한 이야기를 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피는 이날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 카베르네 소비뇽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실제 카베르네 소비뇽 100%로 만든 '라 린테르나 카베르네 소비뇽 라스 메르세데스 2014 빈티지'는 벰버그 와인의 미래로 보였습니다. 라스 메르세데스는 포도밭의 이름입니다. 메르세데스 벤츠와 연관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관련은 없고 스페인에선 흔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라 린테르나 카베르네 소비뇽의 가장 큰 특징은 '스파이시'함입니다. 맛을 상상한다는 게 쉽지는 않지만 매콤한 후추를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에 살짝 뿌렸다면 상상이 가실까요?

앞에서 확 뿜어져 나오는 마늘의 강렬한 매운맛이 아니라 혀의 양끝으로 와인을 오물오물 삼켰을 때 나오는 은은한 매콤함입니다. 평가자에 따라 후추나 고추의 매콤함, 민트의 상큼함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칠레의 카베르네 소비뇽도 매콤한 캐릭터가 특징인데요. 벰버그의 라 린테르나 카베르네 소비뇽 2014는 숙성된 부드러움과 함께 신선한 산미도 살아 있었습니다.

피오네로는 좋은 와인임에는 틀림없지만 '가격'까지 고려한다면 프랑스 보르도의 카베르네 소비뇽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적어도 한국 시장에서는 그럴 것 같습니다. 반면 라 린테르나는 100%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든 와인으로 아르헨티나 와인의 새로운 시도입니다. 마켓 포지셔닝을 엔트리 레벨의 테이블 와인에서 '프리미엄 마켓'으로 가겠다는 신호탄입니다. 더구나 가격도 합리적입니다.

피 와인메이커는 "아르헨티나 말벡 와인은 내수 비중이 높고 수출 비중은 낮은 반면 칠레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은 프리미엄급으로 해외 수출 비중이 높다"면서 "글로벌 와인 시장에서 그 게임에 참전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와인 시장도 프리미엄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수입 와인의 평균 단가가 전년보다 상승했습니다. 한국 시장에서 벰버그의 마케팅도 '고급화'에 맞춘다고 합니다.

피 와인메이커는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최고급 와인은 벰버그라는 수식어가 떠오를 정도로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프리미엄 마케팅 활동을 전개할 예정"이라고 말했습니다.